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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탐방, 시설정보 및 간단 후기

by Jigton GAL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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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Memorial Museum of Forced Mobilization

* 설립취지

인권과 세계평화에 대한 국민 교육의 장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규명함으로써 성숙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인권과 세계평화에 대한 국민 교육의 장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부산항이 대부분의 강제 동원 출발지였고, 강제동원자의 22% 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는 역사성과 접근성 등을 감안하여, 2008년 9월 부산에 건립 방침을 확정했습니다.

2014년 10월까지 50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7만 5465㎡의 부지에 지상3층 지하4층, 건물 연면적 1만 2062㎡ 규모로 지은 본 역사관 내부에는 정부에서 수집한 강제 동원 수기, 사진, 박물류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관을 '유족을 위한 추도, 기념시설'로서의 역할은 물론, '일제 강제동원 역사교육 공간'과 '지역 주민의 친환경적인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또한 UN기념공원을 중심으로 착공된 UN평화기념관과 함께 UN평화문화특구로 지정됨에 따라 이 일대가 평화와 인권의 역사를 기억하고 체험하는 역사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부 : (03152)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길 42 이마빌딩6층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전화 02-721-1800 팩스 02-721-1882
역사관 : (48532) 부산광역시 남구 홍곡로 320번길 100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전화 051-629-8600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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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naver.com

 

 

 

"함께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역사관"

 

 

꼭 가보고 싶었고,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의 정문 진입로는 대연파크푸르지오 옆 우회전하여 위로 석포초등학교를 지나 위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고 지대가 높아서 차량없이는 다소 탐방이 불편하고, 쪽길은 문화회관 뒷편으로 조그만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진입하기 그리 쉽지 않고,   적극적으로 탐방객을 안내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 다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우려는 현실이....

1층 입구를 들어가 7층에 올라간 후 한층씩 탐방하려던 의도는 무너졌다.

하늘공원에서 옆 계단으로 내려오니 건물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모두 차단이 되어 있어서

결국 1층 입구까지 돌아돌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관리인력의 문제일 수 있다고 이해하면서도 한 편으로 크게 아쉬운 점이라고 보인다.

 

 

4층 부터 6층까지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4층의 전망대는 뷰가 좋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가벼운 공간과 카페도 있다.

길 걸음 후 갈증을 한잔의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달래 본다.

 

 

탐방 시작. 엄숙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입구를 들어선다.

 

기억의 터널 시작에 있는 사진

 

 

조선인들의 노무수첩

 

강제동원 역사의 시작

 

78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징병, 위안부, 탄광 및 노역, 군무원 등 많은 분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 온다.

 

 

 

머나먼 타지에서 고향에 보냈던 엽서들

 

전시관 중앙 홀

 

 

일본군 위안소의 위치. - 전쟁 중 이렇게 많은 부대에 위안소가 설치되었었다.

 

강제 징병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우키시마호 사건 - 아래는 네이버 지식백과 중.

 

일제는 패전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한국인 노동자를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 해군을 통해 예하부대에 내렸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강제 징용되었던 7,000여 명의 한국인을 태운 4,740t급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1일,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오미나토항[大溱港]을 떠났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24일,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舞鶴港]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갑자기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의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만내(灣內)에 부설한 미군의 기뢰와 충돌해 우연히 침몰했다는 일본측의 주장과, 함께 탄 일본 해군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있을지도 모를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자폭설 등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지만, 현재로서는 자폭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당국은 배가 방향을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停船) 명령에 따른 것이며, 배가 침몰한 것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또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망자만도 1,000명이 넘으며, 배에 탔던 한국인도 생존자의 말을 빌리면 7,0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총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 배에 승선하였고, 최소한 5,000명이 사망하였다는 자료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키시마호사건 [浮島号事件(부도호사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기억의 터에 복원된 생생한 사진과 증언, 희생자들의 기록이 있다.

 

 

 

열악했던 조선인들의 강제노역 숙소 와 모형.

1937년 일제가 전쟁협력 강요를 위해 취한 조선통치정책. 
'내(內)'라 함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자이며, '선(鮮)'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는 이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이용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라는 기치를 들고 나섰다. 한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말살·차단하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내선일체 [內鮮一體]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피곤한 몸과 다리로 인하여 마음만 느끼고 떠나며...

시간을 두고 자녀와 함께 다시 방문하고자 한다.

건물내에 다양한 지역문화행사를 유치하는 공간이 존재하는 듯 한데.

좀 더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관리하는데 지원이 되기를...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면서.

 

아직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의 표현조차 없는 일제 군국주의 피해와 악행의 역사를 우리 자녀들이 더 마음깊이 느끼게 하고 싶고,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을 때  이러한 치욕과 큰 아픔이 국민들에게 돌아온다는 것.

 

굴욕적 외교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다시 한번 분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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